위기에 빠진 시대, 좌파도 ‘기술 낙관론’을 새롭게 정의해야
지금 우리는 복합적인 위기 속에 살아가고 있다. 기후 위기, 권위주의의 부상 등 다양한 위협이 동시에 얽혀 있다는 점에서, 역사가 애덤 투즈(Adam Tooze)는 이를 '폴리크라이시스(polycrisis)'라 표현했다. 이러한 불안과 위기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관적 전망을 가지지만, 모두가 같은 시각을 공유하는 건 아니다.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은 기술 발전과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낙관적인 미래를 꿈꾼다.
실리콘밸리식 기술 낙관론, 좌파의 가치와 충돌
이러한 형태의 '기술 낙관론(techno-optimism)'은 좌파의 가치와는 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이들은 기술의 성장이 시장의 자유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고 보지만, 이는 종종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노동자 권리와 환경 파괴 문제를 간과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빈부 격차와 사회적 배제가 심화되는 가운데, 기술이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우려도 크다.
과거 좌파는 기술을 긍정했다…다시 상상력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좌파 역시 기술 발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예컨대 칼 마르크스는 기계화와 생산력의 발전이 인간 해방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 중반까지는 공상과학(SF) 작품들을 통해 기술이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이상적인 미래가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현재의 좌파는 기술에 대해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일부는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기술 성장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이는 기술 혁신이 청정 에너지 전환과 지속 가능성 확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즉, 친환경적인 기술 발전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제어 없는 기술에 대한 우려도 타당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긍정적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폭력과 착취를 동반할 수도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나 흑인 문화계의 목소리는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인류의 필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기술이라는 도구는 방향에 따라 사회적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 이중성을 지닌다.
‘모두의 풍요’를 위한 포용적 기술 비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기술 발전 자체를 부정하는 대신, 사회적 연대와 형평성을 바탕으로 미래를 그리는 방식의 새로운 ‘포용적 기술 낙관주의(inclusive techno-optimism)’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 비전은 역사적으로 소외된 공동체를 포함하고, 기술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자는 방향을 추구해야 한다.
현재 과학과 기술의 전진은 사회 전반에 부를 창출하고 복지를 증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필요하다면 대기업의 독점을 견제하면서도, 기술을 공유자산으로 만들어 더 많은 이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정치적 의지가 함께하지 않는 기술 발전은 공익을 담보할 수 없다.
좌파는 이제 기술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기술을 재정의하고 그것을 사회 전체를 위한 도구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 의견
이 글은 기술에 대한 단순한 긍정 혹은 부정을 넘어서 좌파 정치가 마주하고 있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짚어낸다는 점에서 매우 시의적이다. 기술 발전의 방향성에 대한 진보적인 재정의는 기후 위기나 사회적 불평등 같은 현실 문제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지금은 방어적 관점을 넘어서 적극적인 기술 비전을 그려야 할 시기다. 좌파가 기술을 ‘그들만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정치적 상상력을 복원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