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기술 비전은 어디로 갔나?
기술을 향한 낙관주의, 다시 우파의 전유물이 되나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유행, 기술 가속주의
최근 기술을 둘러싼 기대와 열풍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억만장자들을 중심으로 '효과적 가속주의(Effective Accelerationism, e/acc)'라는 움직임이 주목받고 있다. 그들은 인공지능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우려에 반대하며, 오히려 기술이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기술 낙관주의(Techno-optimism)'는 다시 한 번 시대의 키워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은 현재 주로 보수적 혹은 시장 중심 성향의 인물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기술을 통해 자유를 확장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자는 이야기가, 과거 진보 진영이 주도했던 메시지였다는 점을 떠올리면 아이러니하다.
진보는 왜 기술에 등 돌렸나
한때 진보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산업화부터 정보화 시대까지 진보 진영은 기술의 진보가 곧 인간 해방이라고 보았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연구와 공공 투자를 기반으로 한 기술 개발은 오히려 좌파의 전략적 도구로 여겨지곤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미국의 ‘워프 스피드 작전(Operation Warp Speed)’은 정부 개입으로 백신 개발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대표 사례였다. 이처럼 정부 주도의 기술적 성과는 지금도 유효한 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진보 진영은 기술에 대해 점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유전자 편집 기술과 같은 생명과학 분야는 좌파 내에서 더 자주 비판받으며, 심지어 일부 진영에선 기술 발전 자체를 억제하자는 ‘탈성장(Degrowth)’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기술 비관론이 진보의 사회 개혁 능력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단지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기술 접근을 포기하는 순간, 기후 변화나 전염병과 같은 전 지구적 과제를 해결할 힘을 일부 상실할 수 있다. 기술을 통한 인간의 진보 가능성을 외면하면, 새로운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기회 또한 줄어든다.
예컨대 기후위기 대응에서 친환경 에너지 기술, 지속 가능한 식량 생산 방식, 탄소 제거 기술 등이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를 진보가 주도하지 않으면, 공공성과 형평성의 원칙은 시장에 의해 밀려날 수 있다.
기술에 대한 책임감 있는 낙관주의가 필요하다
진보는 다시 기술에 대한 주도권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기술 추종이 아닌, 공익을 위한 책임 있는 개발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평등을 중심에 둔 기술 정책, 공공 투자 확대, 윤리적 기준 강화 등은 진보가 기술과 다시 손잡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기술은 단지 경제 성장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진보 진영은 기술을 회피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더 나은 사회로 연결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의견
이 글은 기술 진보가 진보 진영의 주요 가치였던 시기의 회복을 주장하며 중요한 반성을 촉구한다. 역사적으로 기술은 공공성, 해방, 평등이라는 좌파의 이상을 실현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음에도, 오늘날 진보는 기술에 대해 과도한 시대 불안과 도덕적 경계로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그것의 방향성과 책임을 설계할 수 있는 진보의 재도약이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할지를 결정짓는 정치의 문제다.